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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한국인은 광복을 맞았다. 한반도는 새 나라를 세울 희망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제2차세계대전기에 협조적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대립하기 시작했고, 정치가들 사이에도 이념적 대립이 생겼다.
소련은 먼저 북한에서 토지개혁, 지주와 자산가의 숙청, 중요산업국유화 등을 추진했다. 연합국이 통일 국가를 수립할 방안으로 마련한 미소공동위원회는 신탁통치 문제 등을 둘러싼 좌우의 대립 끝에 결렬되었다.
북한에서는 공산당 주도 아래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북조선인민위원회 등을 거쳐 정부 수립이 추진되었고, 남한에서는 유엔 결의에 따른 총선을 통해 정부 수립이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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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48년 8월과 9월 한반도에는 두 개의 체제가 들어섰다.
하나는 남쪽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쪽의 공산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그동안 1000여년 넘게 통일국가를 유지해 왔던 한민족에게 이는 대단히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두 체제가 한반도에서 사이좋게 양립하기는 어려웠다.
무력을 써서라도 남한을 공산화하길 원한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무력 침공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북한은 일제로부터 거대한 중공업 지대를 물려받은 데다 일찌감치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게다가 소련이 북한의 남한 공산화계획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반면 남한 이승만 정부는 새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것만도 벅차서, 그 북진통일 주장은 구호에 그쳤다.
결국, 전쟁을 벌인다면 그것은 북한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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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1948년 9월 북한정권 수립 직후부터 무력 남침을 꾀하였다.
김일성은 1949년 신년사에서 ‘국토완정’(國土完整)이라는 용어를 무려 13회나 사용하면서 무력 남침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무력 남침 계획을 타진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아직 북한의 전력이 압도적이지 않다고 하여, 남침 계획을 만류하고 더 철저한 준비를 독려하였다.
스탈린은 북한에 소총 1만5천 정, 각종 포 139 문, T-34전차 87대, 항공기 94대 등 무기를 지원하였다.
아울러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 전쟁 문제를 중국의 마오쩌둥과도 협의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1949년 4월 말에 북한 대표가 중국을 방문하여 스탈린과의 협의 결과를 알리자, 마오쩌둥 역시 잠시 전쟁을 유보할 것을 권하고, 남침 준비차 중국인민해방군 내 조선인 2개 사단을 넘겨주었다.
소련은 원자탄을 보유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게 되면 미국의 원자탄이 두려웠기 때문에 49년 3월은 절대 안 된다.
네가 전쟁 일으키면 미국과 소련 전쟁이 되는데 우리는 아직 미국이랑 전쟁을 할 상황이 아니다.
1949년 6월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자 김일성은 8월 다시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락받고자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여전히 전면전은 시기상조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일성은 강원도 삼척 등 일부 지역만이라도 점령하고 싶다고 청했다.
스탈린은 북한의 무력 남침보다는 남한 내 빨치산의 무장봉기에 의해 공산화를 꾀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남로당은 9월에 남한 각 도시의 경찰서와 관공서, 군사령부에 대한 공격과 같은 전면 공세에 나섰다.
당시 개성, 옹진 등 38선 주변 지역에서는 빈번히 남북간 전투가 벌어졌다.
우발적인 소규모 전투가 대규모 전면전으로 커질 수도 있었으므로, 스탈린은 1949년 10월 김일성에게 38선 전투를 하지 말라고 지령을 내렸다.
이후 38선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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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하반기에 들어 공산진영을 북돋우는 방향으로 정세가 변화했다. 1949년 8월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였고 10월에는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을 공산화하였다.
중국 공산화시 미국이 개입을 포기하자, 김일성은 북한의 남침 시에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였다.
김일성이 1950년 1월 소련 대사를 통해 남침 공격을 위한 스탈린과의 회담을 청하자, 스탈린은 여전히 남침을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며, 자신은 이 문제로 다시 김일성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답신하였다.
(스탈린 전문 내용 낭독)
1950년 4월초. 김일성과 박헌영은 비밀리에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비로소 중국이 동의한다는 조건으로 북한의 선제 남침 전쟁을 승인하였다.
여기서 중국의 동의를 조건으로 한 것은 소련이 시킨 전쟁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참전 등으로 북한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을 때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도록 하여 소련의 지원 사실을 숨기려 하였다.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전문 낭독)
마오쩌둥은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기보다는 먼저 대만을 공산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의 결정을 반대할 입장이 아니었기에, 김일성을 지원하기로 동의하였다.
(마오쩌둥은) 경제개혁이라든지 중국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련의 지원이 경제지원이라든지 군사지원이라든지 절실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6.25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이 치밀하게 모의하고 계획한 전쟁이었다.
이후 소련의 군사고문단을 중심으로 남침 공격의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북한의 남침 계획을 보게 되면 3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서울지역을 점령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대전까지 점령하고 세 번째 단계에서는 부산지역까지 완전히 점령하는 이러한 작전계획이 소련 말로 작성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소련군사고문단은 남침 계획 작성뿐만 아니고 북한의 군대 편제 그리고 남침작전을 구체적으로 지휘하는데 깊이 관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50년 6월 16일 스탈린은 남침 개시일자를 6월 25일로 승인하였다.
남침 공격 계획을 세우면서 스탈린과 김일성, 마오쩌둥이 가장 고심한 것은 미군의 참전 가능성이었다.
그 대책으로 김일성과 스탈린은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기 전에 재빨리 전쟁을 종결하기로 하였다.
즉 전면 공격으로 재빨리 서울을 점령하고 남하하여, 미군의 한반도 상륙을 막아 2개월 내에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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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북한의 기습 남침에 대비하지 못하였다.
국군 지휘부는 북한의 병력과 무기의 대규모 이동 정보를 중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국군은 6월 초 사단장 등 지휘부의 대규모 인사이동을 하였다.
또한 6월23일부로 경계강화 조치를 해제시켜 전방부대 병력의 3분의 1 가량이 외출이나 농번기 휴가를 나갔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남침에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북한의 남침 준비 정보를 남한이나 미국이 무시한 것인가?)
트루먼 회고록에 보면 당시 동서 냉전의 전선이 통과되었던 알류산 열도에서 부터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전 세계에 당시 주둔해 있었던 미국 측 현지 사령관들이 자기 점령지역에서 공산군의 공격이 임박해있다 가능성이 높다고 라고 보고들을 해 와서, 한반도에서 그와 같은 공산군의 움직임에 대해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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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북한군은 선제타격작전 계획에 따라 38도선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는 육전대와 유격대를 상륙시켰다.
북한의 김일성은 6월25일 오후 1시35분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이 이날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하였다“고 주장하며, 북한은 그에 반격한 것이라고 남침을 은폐하였다.
한국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소련제 탱크 T-34를 앞세운 북한군은 전쟁 발발 당일 개성(파주-문산 축선)과 동두천, 포천(동두천-의정부 축선)을 점령하였고, 서부전선에서는 파주, 문산을 거쳐 중부전선에서는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격하였다.
특히 의정부-서울 축선에서 북한군은 국군의 7배가 넘는 전투력을 집중하여 국군의 후방 주둔 사단이 전방으로 속속 투입되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28일 새벽. 국군은 미아리 방어선까지 격파 당하고 만다.
북한군이 남침했을 당시에는 한국군이 전방에 배치된 부대들도 공격부대에 비해서 방어수준이 약 4대 1의 정도밖에 미치지 못했고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특히 북한군의 탱크를 방어할 만한 그런 장비나 무기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북한군은 중국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인 군대 사단들을 6.25전쟁 이전에 전부 북한지역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래서 이 전쟁에 참전했던 조선인 병사들이 북한군 사단에 기간요원들로 편성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북한이 전쟁초기에 우세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군은 전장 곳곳에서 북한군에 용감히 맞섰다.
중국의 국공내전 시 국민당군에서는 사단 병력이 통째로 공산군에 투항하는 일도 있었지만, 국군은 달랐다.
춘천을 지키고 있던 육군 6사단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6.25 춘천 전투에서 지휘관들의 사전대비도 많이 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사변 나기 좀 전에 춘천청년단들, 학도호국단들 이런 사람들의 협조를 받아서 진지 보수를 많이 다 해 놨습니다.
시민들이 피난도 안가고 군인들에게 포탄을 날라준다거나 제사공장 직원들이 밥을 해서 갖다주고 춘천이라는 곳이 남다르게 협조가 잘 돼가지고 3일 동안 전투가 유지되었습니다.
육군 6사단은 북한군 2사단에 맞서 남하하던 북한군의 발목을 3일이나 묶어 버렸다.
당황한 북한군은 홍천에서 전투 중인 북한군 12사단의 일부를 춘천으로 급파했고 북한군 12사단 역시 그들이 맡은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타지역의 전투는 전부 성공했는데 춘천만이 이렇게 3일 동안 8시간동안 점령할 것을 3일을 끌어서
그것 때문에 군단장 해임되고 12사단이라고 하는 게 지금 이북에는 없습니다. 그 당시 12사단의 2개연대가 몰살을 당했거든요
그 정도로 춘천전투가 굉장히 북한으로 봐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준 것이죠.
북한군에 의한 서울 함락이 임박하자 이승만 정부는 서울을 탈출하였다.
대한민국이 북한의 남침을 물리치려면 그 정부와 대통령이 살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정부가 시민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서울을 탈출했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3시에 서울을 탈출했다.
국회의원들과 내각도 서울을 탈출했으나, 그를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게다가 국군은 공산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6월 28일 새벽 2시에 한강대교를 폭파했다.
당시 서울 시민 대부분이 정부의 서울 사수 방송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날 낮에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하였고,
90만 명에 달하는 서울 시민 대부분이 꼼짝없이 적 치하에 갇혔다.
이들은 9.28 수복 때까지 석 달 동안 끔찍한 공산 통치를 감내해야 했다.
정부는 임시로 대전으로 옮겼다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옮겼다.
그런데 6월 28일 한강 이북의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3일 동안 그곳에서 지체하였다.
그 덕분에 한국군은 전열을 정비할 귀중한 시간을 얻었다.
정부와 한국군이 전열을 정비함으로써 유엔군의 참전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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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세계정세에서 북한의 남침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북한의 남침 사실을 보고 받은 25일 오전 주한 미국대사 무초를 만나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자신은) 한국을 제2의 사라예보로 만드는 것을 피해왔으나 현재의 위기가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사라예보란 세르비아 출신의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를 저격 살해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된 곳이다.
이승만은 북한의 침략이 단순히 한 민족 내부의 분쟁이 아니라, 세계 자유진영에 대한 공산진영의 공격이므로 세계 자유진영이 총반격해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 현지 시각 1950년 6월 24일(토 : 현지시각) 휴가지에서 북한의 남침 사실을 보고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격노하였다.
그는 “우리는 모든 수를 써서 그들을 막아야 한다”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고 하였다.
그는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이 위협받고, 세계 반공 전선에서 미국의 신뢰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지시했다.
UN은 신속히 움직였다. 6월 25일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의 퇴각을 요구했다.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이틀 후인 27일에는 UN군의 파병을 결의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유엔 결의로 태어난 국가였기 때문이다.
유엔에 의해 성립한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곧 유엔을 침략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7월 초 유엔군을 지휘할 통합군사령부가 설치되고,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을 도우려고 파병 16개 국, 의료지원 5개 국 등 총 21개 국이 6·25전쟁에 참전했고
39개 국이 물자지원을 하는 등 총 60개 국이 지원에 나섰다.
한편 미국은 이와 별도로 남침 개시 다음 날인 6월 26일부터 주일 미 해군과 공군을 투입하였다.
6월 29일에는 맥아더 장군이 한강 남안 영등포에 와서 전선을 시찰하고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한국 상황에 관한 트루먼의 라디오, 텔레비전 연설(1950.7.19.)
수천 마일 떨어진 작은 나라,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는 사태는 모든 미국인에게 중요합니다.
공산주의 세력이 한국을 침략했다는 사실은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공격 행동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명시적으로 이야기 하는데 이 전쟁은 스탈린이 일으킨 전쟁이다.
스탈린이 이제 자본주의 공산주의 대결에서 변방지역을 찔러보는 거다.
한반도에 전쟁을 한번 일으켜보고 서방 지역이 어떠한 대응을 하느냐.
서방의 의지와 능력을 테스트해보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트루먼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만약에 우리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스탈린이 어디 다른 지역에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확실한 대응을 해줘야 한다.
즉각적으로 유엔에다가 결의안 제출하고 유엔의 서방진영 국가들을 모아서 즉각적으로 참전하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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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은 북한의 남침 시 일시 후퇴하여 북한군을 남한 깊숙이 끌어들였다가 반격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한강이 1차 방어선, 금강이 2차 방어선, 낙동강이 3차 방어선이었다.
북한군에 밀려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에는 마침내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대구로부터 남으로 마산까지 서남부 방어는 유엔군이, 대구로부터 동으로 포항까지는 국군이 방어를 맡았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에서 9월 중순까지 낙동강전선에서 북한군과 혈전을 계속하였다.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미군은 북한군에 맹폭을 퍼부었으며, 지상에서는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특히 대구로 통하는 전술적 요지인 대구 북방 22km 지점의 칠곡군 다부동에서는 55일간이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지를 10여 차례나 뺏고 빼앗기며 북한군 2만 4천여명, 국군과 유엔군 1만여명의 사상자가 나온 전투에서 국군 1사단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백선엽 장군 회고록 문장 소개)
전선의 상황이 너무 급해 학도병 등으로 신병을 받아도 이들을 제대로 훈련시킬 여유가 없었다.
이들은 겨우 3~4시간 동안 기본적인 소총 사격 훈련과 수류탄 투척 요령만 습득한 뒤 곧바로 전선으로 투입됐다.
희생자는 계속 늘었고 ‘고문관’으로 불리는 신병들은 계속 도착했다.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나면 부대원의 30~40퍼센트가 사라졌다.
이들은 신병으로 교체됐다. 나중에는 분대장이 자신에게 배속된 분대원의 얼굴과 이름도 모른채 전투에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군적도 없이 죽어간 무명용사들, 그들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떠받친 주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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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이끄는 UN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유엔군 상륙부대가 한반도 중부에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면 낙동강전선의 유엔군이 대반격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군사·전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전세를 일거에 전환시켰던 터닝포인트 라는 거죠.
북한군의 기습공격에 의해 한국군이 수세에 몰렸고 낙동강 방어선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일거에 전세를 전환시켰던 가장 중요한 작전 중의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상륙 작전 후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유엔군과 국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이제는 38선을 넘어 북진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승만은 북한의 침공으로 38선은 없어졌으며 이 기회에 북한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9월 말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한국군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북진 명령을 내렸다.
그에 따라 10월 1일 강릉 방면의 국군 3사단이 최초로 38선을 돌파했다.
10월 7일에는 유엔군이 38선을 넘었고, 그 뒤 유엔 총회가 이를 추인하였다.
8월부터 우리가 어디까지 공격해야 되느냐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시각은 북진해야한다. 이미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38선은 없어진 것이다.
없어진 것이기 때문에 올라가도 된다. 올라가서 침략자들을 응징을 해야 한다.
두 번째 주장은 조심해야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올라가게 되면 중국이나 소련이 참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설이 같이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은 미국 정부에서 50년 9월 9일 국가안보회의, NSC죠. 국가안보회의에서 결정을 하게 됩니다.
38선 이북 진격을 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건 미국에서 결정을 한 거고 유엔군이 38선을 넘기 위해서는 유엔에서의 새로운 결의안이 필요했습니다.
10월 7일에 유엔 총회에서 결의안이 나오고
10월 19일 국군 1사단이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다.
국군 중 선두 부대는 압록강에 도달했고 유엔군도 한반도에서 공산군을 몰아내기 위한 마지막 공세에 몰입했다.
모두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것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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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거꾸로 김일성이 멸망 위기에 몰렸다.
10월 1일 김일성은 다급히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10월 12일 비밀리에 평양을 탈출하여 14일 평안남도 덕천으로 옮겼다가 19일에는 평안북도 대유동으로 옮겼으며, 그후에도 미군의 폭격을 피해 압록강변의 오지로 옮겨다녔다.
소련과 중국은 참전을 결정하였다.
마오쩌둥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脣亡齒寒) 것처럼 북한이 망하면 중국이 위태로워진다고 하며, 당초의 약속대로 군대를 보냈다.
“스스로 북한을 돕기 위해 지원했다”는 조선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1950년 10월19일 펑더화이의 지휘 아래 1차로 30만여 명의 병력이 압록강 3개 지점을 거쳐 입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적의 주력은 북한군이 아니라 중공군이었다.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이 가진 것처럼, 북한군의 작전권도 사실상 중공군에게 넘어갔다.
중공군은 일본군과, 또 장제스의 국부군과 싸우면서 전투력이 강해진 군대였다.
소련군도 1950년 11월부터 참전하였다. 소련군은 공군을 참전케 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확전 가능성을 우려하여 소련군 비행기를 중공 항공기인 것처럼 꾸몄고, 조종사는 중공군 복장에 중국어를 쓰도록 교육받았다.
중공군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한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11월1일 평안북도 운산 일대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평양을 거쳐 초산까지 진격한 국군이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았고 운산 북방 구봉산에서도 중공군에 포위되었다.
그리고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던 유엔군 역시 중공군의 압박에 악전고투해야 했다.
10월 25일 생포한 중공군 포로의 진술내용을 무시하고 중공군의 출현을 과소평가한 유엔군의 피해는 아주 컸다.
중공군의 참전가능성에 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경고를 하고 실제로 징후에 관한 보고를 했습니다만 맥아더 사령부, 특히 맥아더 원수가 중공군 참전에 관한 가능성을 애써서 부인했습니다.
참전한다고 하더라도 소수부대일테고 충분히 유엔군 전력으로 압도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계속해서 압록강까지 진격하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따라서 최고사령부의 정책적인 전략적인 판단이 중공군의 참전을 충분히 예상하지 못했고 중공군이 참전했을 때 실제로 선방, 잘 대응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일명 ‘크리스마스공세’였던 11월 24일 최종공세에서도 큰 손실을 입은 유엔군은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당시 맥아더가 예상했던 참전 중국 인민지원군의 숫자는 약 8만에서 12만 사이라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당시 참전했던 중국인민지원군의 숫자는 거의 60만명 이상의 숫자로 확인되었습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 대공세, 즉 1950년 12월 25일까지 한만국경선까지 진격해서 전쟁을 종결하려고 했던 맥아더의 구상은 대규모의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좌절하게 된 것입니다.
동북방면의 유엔군도 엄청난 수의 중공군과 맞닥뜨렸다.
북한의 임시수도 평안북도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 1사단은 10배나 많은 중공군 7개 사단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15일간 영하 20~30도의 혹한 속에서 치른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3천여 명의 전사자 등 사상 최악의 피해를 입었으나,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성공적으로 철수하였다.
이미 남쪽의 원산 방면이 차단당했기 때문에 유엔군은 12월 23일까지 흥남에서 철수했다.
이때 자유를 찾는 북한 주민 10만 여명도 유엔군과 함께 탈출하였다.
결국 1951년 1.4 후퇴로 서울을 중공군에 내주었다.
중공군은 경기도 평택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다시 유엔군이 반격하였다.
유엔군은 1951년 3월 15일 중공군에게서 서울을 되찾았고, 여세를 몰아 3월말에는 38선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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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5월 중공군의 춘계공세 이후 양측 모두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전선은 교착되었으며, 휴전이 모색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막후 접촉에서 휴전에 동의하였다.
정전협상의 가장 큰 쟁점은 남북간 경계선과 포로교환 문제였다. 경계선은 전쟁 전의 38선이 아니라 정전 시의 군사 접촉선으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포로 교환의 문제는 쉽게 합의되지 않았다.
유엔군은 공산권 포로의 자유의사 귀환을 원칙으로 했다. 이에 대해 공산측이 반발하여 한동안 휴전회담이 결렬되었다.
하지만 미국, 소련, 중국 모두 휴전을 원했다. 1953년 3월 휴전회담이 다시 열렸다.
이때부터 이승만의 휴전 반대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기회가 무산된다고 하여 휴전에 반대했다.
그는 정전회담에서 한국군 대표를 철수시켰다.
정전시에는 국군의 작전권을 회수해서 단독으로 국군을 북진(北進)시키겠다고 위협했다.
휴전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미 대사관에 난입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진짜 속내는 안전보장 없는 휴전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휴전 후 미군이 철수하면 한국은 또다시 소련, 중국의 후원을 받은 북한의 침략 위험 아래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휴전회담이 개막된 직후부터 한국정부와 한국국민들은 휴전회담을 반대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휴전회담에 반대한 것이 아니고 북한군의 재침략을 막을 수 있는 그런 안전보장 조치가 없는 한 휴전회담은 있을 수 없다는 그런 이유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휴전회담을 결정하면서 한국정부와 제대로 상의하지 않고 유엔군의 일방적인 공산군측과의 합의에 의해서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휴전회담 자체에 대해서 상당히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골치아픈 이승만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계획(Everready plan)까지 검토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경악한 미국이 미군 철수로 위협하자, 이승만은 이번에는 유화책을 썼다.
정전 결정에 따를 터이니 그에 앞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달라고 했다.
이승만의 끈질긴 투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정전 후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로 약속하였다.
53년 6월에 반공포로를 두 차례 걸쳐서 석방했던 것도 이런 미국의 소극적인 자세에 대해서 압력을 넣고 방위조약체결에 대한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죠. 실제 그것이 주효했습니다
53년 7월 초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로버트슨이라는 특사를 보내 이승만 대통령을 달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기로 하고
그 전제하에서 휴전협상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앞으로 있을 54년 5월의 제네바 정치회담에 대해서도 협조를 하는 것으로 그렇게 이승만 로버트슨 조인트 코뮤니케(공식 성명서)를 발표 하거든요.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3년 1개월 2일, 1,129일 동안 계속됐던 6·25전쟁은 휴전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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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으로 대한민국은 엄청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었다. 주택과 학교, 공공시설, 도로, 철도, 교량 등 기반시설과 공장 등 각종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물적 피해액은 당시 2년치의 국민총생산액에 달했다. 여기에 군인 전사상자, 실종자가 62만 명, 민간인 사망, 부상, 실종자가 99여만 명이었으며, 유엔군 사상자 실종자가 15만 명에 달했다.
수십만의 전쟁고아와 미망인이 발생하였으며 가족이 헤어진 이산가족이 1000만 명에 달하였다.
북한측도 많은 인명과 물적 피해를 입었다. 전쟁기간 동안 북한군의 전사상자 및 실종자는 64만 명에 달했으며, 인해전술로 밀어붙였던 중공군의 피해는 이보다 더해서 전사상 및 실종자가 97만 명에 달했다.
북한 민간인 피해자는 150만 명에 달했다. 6·25전쟁 전 남한보다 월등했던 북한의 산업시설과 주택, 건물, 기반시설도 전쟁 중에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다.
이 엄청난 손실과 피해 사실을 보면, 북한 공산정권이 무력 공산 통일을 꾀한 것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재난을 초래했는지를 알 수 있다.
6.25전쟁은 또한 대한민국의 국민의식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50년 여름 남한 주민은 공산치하를 경험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남한 주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귀속 의식과 애국심을 갖게 되었다.
북한공산집단은 약 20만 명의 남한 젊은이들을 인민군으로 납치하여 사지로 몰아넣었고 농촌에서는 이미 완료된 농지개혁을 다시 했으나, 농민에게는 아무런 실익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토지를 농민에게 나눠준 대가로 현물세를 징수했는데 경작지 1평당 작물의 포기 수, 포기 당 이삭 수, 이삭 당 낱알 수를 계산하여, 이것들을 일일이 곱한 후 내야 할 평당 세금을 산정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집회를 열어 국민들을 동원하고 소위 반동분자를 뽑아 즉결 인민재판으로 학살하였다.
이처럼 북한의 점령 통치는 매우 가혹한 것이어서 짧은 기간이나마 민주주의 체제를 경험했던 남한 주민들의 증오와 원성을 낳았고, 주민들로부터 외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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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6.25전쟁 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의 안보 태세가 굳건해졌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0월1일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되었고 1954년 11월17일에 정식 발효되었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민국은 비로소 외부적으로 안보를 튼튼히 할 수 있는 그런 기반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미군 2개 사단이 주둔하게 되었다. 특히 이 미군은 최전방 휴전선에 배치되어 북한의 남침 공격 시 자동적으로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다.
아울러 국군도 대폭 증강되었다.
전쟁 전 한국군은 10만 명 정도였으나, 전쟁 후에는 70만 명으로까지 늘었다.
전쟁 전 8개 사단이 휴전 당시 3개 군단 18개 사단으로 늘어난 국군은 이듬해 1954년 5월까지 5개 군단 20개 사단으로 증편되었다.
해마다 1천명, 총 1만 명 가량의 군 간부들이 미국에서 연수하면서 선진 군 전술과 행정관리법을 배웠다.
이로써 국군의 국방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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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유엔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다.
유엔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세계지도에서, 또 한민족의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한 나라 국민이 자신을 지키려는 의지와 헌신이 없는데 외국군이 홀로 그 나라를 지킬 수는 없는 법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군, 국민이 나라를 지키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숭고한 헌신을 하였기에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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